에른스트 칼텐브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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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1903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친위대에서 활동하며,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에는 공안 담당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가안전본부(RSHA) 국장으로 임명되어 게슈타포를 비롯한 독일 전역의 경찰력을 통제하며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다. 1945년 미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와 인도에 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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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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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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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출생일 | 1903년 10월 4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리트임잉크라이스 |
사망일 | 1946년 10월 16일 |
사망지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 교도소 |
사망 원인 | 교수형 |
국적 | 오스트리아 |
배우자 | 엘리자베트 에더(1934년 결혼) |
파트너 | 기젤라 그레핀 폰 베스타르프 |
자녀 | 5명 |
학력 | 그라츠 대학교 |
직업 | 변호사 |
소속 정당 | 나치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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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슈츠슈타펠 |
복무 기간 | 1931년–1945년 |
계급 | 오베르그루펜퓌러 |
주요 보직 | |
국가보안본부 장관 | 1943년 1월 30일 – 1945년 5월 8일 |
보안국 국장 | 1943년 1월 30일 – 1945년 5월 8일 |
인터폴 총재 | 1943년 1월 30일 – 1945년 5월 12일 |
오스트리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 1938년 3월 13일 – 1943년 1월 30일 |
추가 보직 | |
남부 독일 사령관 | 1945년 4월–5월 |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 | 1943년–1945년 |
독일 국회 의원 | 1938년–1945년 |
오스트리아 공안 차관 | 1938년 3월 |
오버외스터라이히 나치당 지구 연설가 | 1931년–1933년 |
형사 유죄 판결 | |
죄목 |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벌 | 사형 |
상태 | 사형 집행 |
2. 생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 리트임잉크라이스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린츠와 그라츠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26년 학위를 취득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32년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친위대에 가입하여 1934년 불법 정치 활동과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 음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곧 풀려나 오스트리아 친위대 지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1]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에는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친위대 중장으로 승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무장친위대로 보직을 옮겨 독일 내 치안경찰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후, 독일경찰청장과 국가안전본부장에 임명되어 친위대 대장과 경찰대장 칭호를 받고 게슈타포를 비롯한 독일 전역의 경찰력을 통제하게 되었다.[3]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때는 주모자와 가담자들의 재판과 처형을 담당했고, 오토 스코르체니와 함께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 등 연합국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롱 점프 작전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힘러와는 계속 갈등 관계에 있었으며, 칼텐브루너의 계급과 권력이 강해질수록 양자 간의 권력투쟁도 심화되었다. 1944년 12월에는 무장친위대와 경찰대장(General der Polizei und Waffen-SS)으로 승진, 사실상 힘러 다음가는 친위대의 실권자로 자리를 굳혔다.[3]
1945년 4월 힘러로부터 남부유럽 독일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황 악화로 5월에 사령부를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 은거하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으며, 심지어 진술서 등 관련 서류에 서명조차 하기를 거부했다. 최종 판결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대한 죄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41]
2. 1. 초기 생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 리트임잉크라이스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린츠와 그라츠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나치의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26년 학위를 취득한 뒤 린츠와 잘츠부르크 등지에서 변호사로 일했다.[1][2]초기 및 초등 교육은 라아브에서 받았고, 이후 린츠의 레알김나지움에 다녔다. 민족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실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악명 높은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과 어린 시절 친구였다. 레알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926년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3][4]
잘츠부르크의 법률 사무소에서 1년 동안 일한 후 린츠에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그는 학창 시절 결투에서 생긴 것으로 알려진 얼굴에 깊은 흉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자동차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190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오스트리아주(Oberösterreich)의 공업 도시 리트 임 인크라이스(Ried im Innkrei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 후고 칼텐브루너(Hugo Kaltenbrunner)였고, 어머니는 테레제(Therese)였다. 칼텐브루너 가문은 할아버지 대부터 변호사였던 가톨릭 가정이었다.[1][2]
7세까지 라프(Laab)에서 자랐고, 1913년 린츠(Linz)의 실과 깅나지움(Gymnasium)에 입학했다. 깅나지움 재학 중에 범게르만주의적(汎German主義的)이고 반교권주의적인(反教權主義的) 학생 동아리(Burschenschaft)인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에 가입했다.[1] 이 깅나지움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도 다녔으며, 두 사람은 친구였다.
1921년 가을에 그라츠(Graz)의 그라츠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Graz)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1923년에 법학으로 전과했다.[1][4] 1926년 여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 칼텐브루너 본인에 따르면 그의 대학 생활은 탄광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고학하는 것이었고, 그는 종종 자신이 노동자의 친구임을 강조했다.[2] 대학 재학 중에 학생 동아리(Burschenschaft)인 “알미니아(AlArminia)”에 가입했다. 칼텐브루너는 열성적인 활동가였으며, 단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범게르만주의, 반교권주의, 반유대주의, 반자유주의 사상 등에 영향을 받아 독일인에 의한 독일-오스트리아 통일을 목표로 했다.
1926년 그라츠에서 린츠로 이주하여 린츠 지방 법원에서 사법관 시보로 수습을 받았다. 1928년에는 변호사 사무소에 취직했다.[6]
2. 2.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친위대 활동
1930년 10월 18일, 칼텐브루너는 나치당에 회원번호 300,179번으로 가입했다.[3] 1931년에는 오베뢰스터라이히 나치당 지구 연설자(Bezirksredner)였다. 1931년 8월 31일에는 친위대(SS)에 가입했고, SS 번호는 13,039였다.[3][4] 1929년에 처음으로 나치당의 법률 고문(Rechtsberater)이 되었고, 1932년부터는 SS 아브슈니트(섹션) VIII에서 같은 직책을 맡았다.[4] 같은 해 그는 아버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33년까지는 린츠의 국가 사회주의 변호사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4]1934년 1월, 칼텐브루너는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부에 의해 음모 혐의로 다른 나치당원들과 함께 카이저슈타인브루흐 구금소에 잠시 투옥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단식 투쟁을 이끌어 정부가 당원 490명을 석방하도록 했다. 1935년에는 반역죄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 이 혐의는 기각되었지만, 음모죄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4][12]
1935년 중반부터 칼텐브루너는 린츠의 불법 SS 아브슈니트 VIII의 책임자였으며 오스트리아 SS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및 하인츠 요스트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칼텐브루너는 바이에른으로 여러 차례 여행을 갔다. 그는 기차와 파사우로 가는 배에 숨어서 오스트리아 동지들에게 돈과 명령을 가지고 돌아왔다.[13] 1937년 칼텐브루너는 오베뢰스터라이히에서 불법 나치당 조직을 이끌었다는 혐의로 오스트리아 당국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9월에 석방되었다.[13]

헤르만 괴링의 명령에 따라 칼텐브루너는 독일과의 안슐루스(1938년 3월 13일)를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938년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자이스-인쿠아르트 내각에서 공공 안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18][19][20][21] 힘러의 비밀 지시를 받은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인구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오스트리아 SS를 비밀리에 이끌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사회의 모든 측면에 대한 나치화가 포함되었다.[17] 1938년 3월 21일, 그는 SS-여단장으로 승진했다.[3][15][16] 1938년 4월 10일부터 1945년 5월 8일까지 독일 국회(Reichstag) 의원이었다.[3][4] 이러한 활동 중에 그는 린츠 근처에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18] 마우트하우젠은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에 처음으로 문을 연 나치 강제 수용소였다. 1938년 9월 11일,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SS-오베라브슈니트(1938년 11월 SS-오베라브슈니트 도나우로 개명됨)의 지도자직을 맡고 있는 동안 SS-사단장(독일군 중장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또한 1938년, 그는 오베라브슈니트 도나우의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SSPF)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SS 사령부였다(그는 1943년 1월 30일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3]
2. 3. 국가보안본부장 임명과 전쟁 범죄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암살당한 뒤, 칼텐브루너는 독일경찰청장과 국가안전본부장에 임명되었다.[3] 그는 상급집단지도자와 경찰대장 칭호를 받았으며, 게슈타포를 비롯한 독일 전역의 경찰력을 통제하는 위치에 올랐다.[3]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때는 주모자와 가담자들의 재판과 처형을 담당했고, 오토 스코르체니와 함께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 등 연합국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롱 점프 작전을 입안하기도 했다.[3] 그러나 하인리히 힘러와는 계속 갈등 관계에 있었으며, 칼텐브루너의 계급과 권력이 강해질수록 양자 간의 권력투쟁도 심화되었다.[3] 1944년 12월에는 무장친위대와 경찰대장(General der Polizei und Waffen-SS)으로 승진하여 힘러 다음가는 친위대의 실권자로 자리 잡았다.[3]
1943년 1월 30일 칼텐브루너는 국가안전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29] 이로써 그는 게슈타포, 형사경찰, 친위대 정보부(SD), 그리고 동부 전선 후방에서 패전까지 100만 명을 학살한 아인자츠그룹펜 등의 책임자가 되었다.[3] 그는 인종 재정착 계획과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집행자였다.[30] 칼텐브루너의 독려에 따라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사냥이 조직적으로 실행되었고, 수백만 명이 학살되었다. 칼텐브루너는 1943년 봄과 여름, 그동안 멸절 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테레지엔슈타트 게토의 "특권적인 독일계 유대인"들도 멸절 과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31]
1944년 2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실각과 함께 그가 지휘했던 국방군 정보부 "압베어"는 국가안보본부 제6국(국장 발터 셰렌베르크)의 하부 조직이 되었다.[3]
1944년 3월, 칼텐브루너는 "탄환 포고령(Kugel-Erlaß)"을 발령했다. 이 포고령에 따라 미국인과 영국인을 제외한 탈출한 전쟁 포로는 국가안보본부의 보안경찰과 SD에 인계되어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총살당하게 되었다.[29] 이 포고령의 대상은 장교 및 상급 하사관이었으며,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문의가 있을 경우 "탈출 후 아직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답변하도록 규정되었다.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했다. 칼텐브루너는 3월 22일 헝가리로 가서 새로 임명된 친독파 수상 슈토이-데메를 만났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안보본부가 수행하는 "유대인 문제의 신속한 해결"에 협력하고 유대인 이송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후 수일간 부다페스트에 머물면서 헝가리 당국과 유대인 이송에 대해 협의했고, 실행 세부 사항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맡겼다. 아이히만의 지휘하에 1944년 5월 중순부터 6월 30일까지 불과 한 달 반 만에 38만 1600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중 24만 명이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되었다.[32]
1944년 6월, 칼텐브루너는 독일을 공습한 연합군 조종사 처리에 대해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본부장 대리 발터 발리몽트와 협의했다. 시민이나 그 재산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기총 사격을 했다고 인정되는 연합군 조종사는 SD에 인계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하기로 결정했다.[30]
1944년 7월 20일 12시 40분경,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에 있던 총통대본영 「늑대굴」의 회의실에서 히틀러가 장교들과 회의 중에 참모본부 대령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국내 예비군 참모장)이 설치한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장교와 속기사 중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히틀러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히틀러 암살 계획).
칼텐브루너는 사건 당시 베를린 국가안전본부에 있었지만, 초기 수사는 좋지 못했다. 회의실에서 홀연히 사라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심문하라는 명령을 전화로 받았다. 즉시 게슈타포 장교 훔베르트 아하머-피플라더 친위대 상급대좌(de:Humbert Achamer-Pifrader)를 국내 예비군 사령부가 있는 벤틀러가 국방성에 파견했지만, 피플라더는 슈타우펜베르크 일당에게 체포당했다. 피플라더가 돌아오지 않자 칼텐브루너와 국가안전본부는 적을 과대평가하여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발키리 작전」에 따라 베를린 관청가를 돌아다니는 국방군 군인들에게 어떠한 효과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33]
7월 20일 중, 벤틀러가 내부에서 반쿠데타파 군인들이 쿠데타파 군인들을 제압했다. 국내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의 명령으로 슈타우펜베르크 등 쿠데타파 지도자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칼텐브루너는 즉시 벤틀러가로 달려가 수사를 진행하도록 하고 독단적인 총살형을 집행하지 말 것을 프롬에게 지시했다.[34]
이후 수사는 국가안전본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칼텐브루너가 지휘했다.[35][36] 국가안전본부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 밑에 「1944년 7월 20일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여 수사를 시작하고, 그 조사 결과를 당관방장 마르틴 보르만에게 제출했다.[37] 철저한 수사로 약 7,000명이 체포되었다. 그중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인민재판소로 보내져 처형된 자는 최소 200명에 달한다.[38] 칼텐브루너는 수사 책임자로서 인민재판소에서 재판 상황을 방청했지만, 프라이슬러의 재판 지휘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이 삼류 배우는 무능한 혁명가나 실패한 암살자조차 순교자로 만들어 버린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39] 마르틴 보르만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프라이슬러의 방법을 비판했지만, 히틀러는 프라이슬러의 방법이 좋다고 판단하여 음모자들의 재판을 계속 프라이슬러에게 맡겼다. 칼텐브루너의 보고서는 허사로 끝났다.[40]
2. 4. 몰락과 최후
1945년 4월, 전쟁 말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남부유럽의 독일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황 악화로 인해 5월에 사령부를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 은거하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41]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범죄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으며, 심지어 진술서 등 관련 서류에 서명조차 하기를 거부했다.[41] 결국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대한 죄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41]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칼텐브루너는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대한 범죄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46] SS 장군이자 RSHA(국가안전본부) 국장으로서 책임을 지닌 지역 때문에 평화에 대한 범죄 혐의는 무죄였지만, 전쟁 범죄와 인도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초기, 칼텐브루너는 두 차례의 지주막하출혈로 인해 재판에 불참했다.[48] 건강이 회복된 후, 재판소는 그의 사면 요청을 거부했다. 군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자신에 대한 기소 내용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칼텐브루너는 자신의 서명이 있는 모든 법령과 법적 문서는 "고무도장"처럼 처리되었고 부관이 제출했다고 말했다. 또한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가 문제의 많은 문서에 불법적으로 자신의 서명을 첨부했다고 주장했다.
칼텐브루너는 자신의 변론에서 RSHA 국장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했고, 그는 오직 스파이 활동과 정보 활동에만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힘러가 RSHA 국장 재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3년 이전에는 최종 해결 방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유대인의 학대에 대해 힘러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고 주장했다. 총사령관 명령에 대해 전혀 몰랐고, 방문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없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한때 칼텐브루너는 자신이 최종 해결 방안을 종식시킨 장본인이라고까지 주장했다.
1946년 9월 30일, 국제군사재판소(IMT)는 칼텐브루너가 평화에 대한 범죄는 무죄이나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3항과 4항)에 대해서는 유죄라고 판결했다. 1946년 10월 1일, IMT는 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칼텐브루너는 1946년 10월 16일 새벽 1시 15분경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다른 9명의 사형수와 전날 자살한 헤르만 괴링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Ostfriedhof) 뮌헨 동쪽 묘지에서 화장되었고, 재는 이자르 강의 지류에 뿌려졌다.[54]
1945년 3월 중순과 4월 중순에 칼텐브루너는 독단적으로 단독 강화를 기도하여, SD 장교 빌헬름 횔틀(친위대 소좌)(de)을 스위스로 파견하여 미국 정보기관 OSS(CIA의 전신)의 유럽 대표 앨런 덜레스와 협상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41]
패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19일, 칼텐브루너는 측근들과 함께 베를린을 떠나 잘츠부르크로 자신의 사령부를 옮겼다. “알프스 국가 요새”에 틀어박혀 여기서 끝까지 저항을 지원하려 했다. 많은 나치 고위 관료들이 약탈한 귀중품을 가지고 와서 전후에 대비했다. 5월 1일에는 슈타이어마르크주의 알타우스제(de)로 이동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알타우스제에 유대인 이송 보고를 위해 나타났지만, 칼텐브루너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41]
1945년 5월 11일 미국 육군 대적정보부대(CIC)가 칼텐브루너를 체포했다.[41] 칼텐브루너는 노르트하우젠 근처의 미국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미국군은 그가 칼텐브루너인 줄 몰랐고, 단순한 독일군 장교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동 중에 그를 발견한 애인이 본명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칼텐브루너임이 밝혀졌다. 곧 룩셈부르크 바트 몬도르프의 팔래스 호텔에 설치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43] 여기에는 헤르만 괴링, 카를 되니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프란츠 폰 파펜, 히알마르 샤흐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될 나치 최고위급 인사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칼텐브루너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위해 국제군사재판소에 수감되었다.[41] 수감 중 칼텐브루너는 유럽 유대인 대량학살 정책 집행 경력과 평소의 술버릇 등으로 피고들 사이에서 "'''SS의 돼지 같은 놈'''"이라고 불리며 율리우스 슈트라이히어와 마찬가지로 혐오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국제군사재판에서 그는 미군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언급하며 낙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제1항 "침략 전쟁 공모", 제3항 "전쟁 범죄", 제4항 "인도에 대한 죄"로 기소되었다. 기소장을 받았을 때, 칼텐브루너는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며 울었다고 한다.[46] 기소장에 대한 논평을 요청받자 그는 "어떤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저는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지 정보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히믈러의 대리 역할을 하는 것은 거부합니다."라고 썼다.[47]
재판 개정 직전 그는 지주막하출혈로 독방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48]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혈압이 상승하여 혈관이 파열된 것이었다.[49]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치료 때문에 한동안 불참했다. 그러나 12월 10일부터 출석하게 되었다.[50]
검찰측 최종 변론에서 소련 수석 검사 중장은 "칼텐브루너는 체코슬로바키아 애국자들에 의해 역살해당한 처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후계자로서, 히믈러에 따르면 최적임자였다. 칼텐브루너는 처형자의 후계자로서, 또 스스로 처형자로서, 히틀러 일당의 일반적인 범죄 계획에서 매우 혐오스러운 기능을 담당했다"고 비난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사형을 피하려 했다. 그의 법정 전략은 게슈타포를 비롯한 그의 지휘하에 있던 기관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 범죄에 어떠한 연루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실행범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기밀 업무에 대해 일종의 명목상 대표를 맡았을 뿐이며, 실제로는 SD의 정보 활동 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7] 국가안전본부와 관련된 이전 행동의 결과로 범죄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필요하다면 검찰이 제시한 문서의 자신의 서명조차 부인했다.
1946년 10월 1일, 피고 전원에게 판결이 선고되었다. 먼저 피고 전원이 모인 가운데, 한 명씩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칼텐브루너의 판결문은 "칼텐브루너가 침략 전쟁 수행 계획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은 침략 전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라고 하여 그를 제1항 "침략 전쟁 공모"에 대해 무죄로 판결했다. 반면에 "칼텐브루너는 강제 수용소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강제 수용소 내 유대인 학살은 RSHA의 관할 사항이며, 칼텐브루너는 그 장관이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총살 명령""을 비롯한 포로 학대 및 살해에 관여했다"라는 이유로 제3항 "전쟁 범죄"와 제4항 "인도에 대한 죄"에 대해 유죄로 판결했다.[51] 그 후, 개별적으로 선고된 형량 판결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52]
1946년 10월 4일, 사형수 칼텐브루너는 43세 생일을 맞았지만, 그는 "사형 선고문을 주머니에 넣고 생일을 맞는다는 것은 정말 기묘한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상관인 힘러를 원망하며, "그는 부하들에게 명예와 충성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재빨리 자살하여 도망쳤다"며 분노를 드러냈다.
10월 16일 1시 10분부터 자살한 헤르만 괴링을 제외한 사형수 10명의 교수형이 순서대로 집행되었다. 칼텐브루너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빌헬름 카이텔 다음으로 세 번째로 사형을 당했다.[53]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나의 국민과 나의 조국에 뜨거운 마음으로 봉사했습니다. 나는 나의 의무를 조국의 법에 따라 수행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우리 국민이 주로 군인들에게 이끌리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범죄가 저질러진 것도 유감이지만, 나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독일이여, 건강하게."였다.
자살한 괴링을 포함하여 칼텐브루너 등 11명의 시체는 미군 사진사에 의해 촬영되었다. 촬영 후 나무 상자에 담겨 미군 군용 트럭으로 뮌헨 교외의 묘지 화장장으로 옮겨져 소각되었다. 유골은 이스라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Würm)에 뿌려졌다.[54]
3. 개인사
칼텐브루너는 오스트리아 리트임인크라이스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아브에서 초기 및 초등 교육을 받았고, 이후 린츠의 레알김나지움에 다녔다. 민족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나중에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실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과 어린 시절 친구였다.[1]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926년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잘츠부르크의 법률 사무소에서 1년 동안 일한 후 린츠에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3] 그는 학창 시절 결투에서 생긴 것으로 알려진 얼굴에 깊은 흉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자동차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4]
1934년 1월 14일, 칼텐브루너는 나치당 당원이었던 엘리자베트 에더(1908년 10월 20일 – 2002년 5월 20일)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결혼으로 얻은 자녀 외에도, 오랜 애인인 기젤라 그래핀 폰 베스타프(1920년 6월 27일 – 1983년 6월 2일)와 쌍둥이 자녀 우르술라와 볼프강(1945년생)을 두었다. 모든 자녀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5]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에 억세고 단단한 체격이었다.[6] 그 체격과 무서운 뺨의 상처 때문에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인들 중에서 가장 "나치스다운 나치"로 평판이었고, 그가 법정에 들어서면 카메라맨들이 앞다투어 카메라를 향했다.[55] 그러나 그의 뺨의 상처는 전상이나 결투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를 냈을 때 앞 유리에 부딪혀 생긴 것이었다.[47]
뉘른베르크 교도소 소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개정 전에 피고인 전원에게 실시한 웩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 따르면, 칼텐브루너의 지능 지수는 113으로, 모든 피고인 중에서는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56]
알코올 중독자이자 헤비 스모커였다.[6]
뉘른베르크 재판 중 레온 골덴소른과의 인터뷰에서 칼텐브루너는 자신은 히믈러의 명령에 따른 잔혹 행위와는 무관하며, '제2의 히믈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7] 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미국군이 먼저 독일군을 공격했기 때문이라며 비판했다.[8] 그는 나치 정권의 나치화 정책은 연합국의 비나치화 정책이나 소련의 적화 정책만큼 압제적이지 않다고 변호했다.[9]
히틀러에 대해서는 독재 국가의 지도자가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 잘 돌아가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듣지 않았고 숫자에 관해서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다고 말했다.[10]
히믈러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재미없는 인간이었으며, 남을 교육하여 향상시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11] 또한 히믈러가 하이드리히와 다류게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해 자신을 보호했다고 말했다.[12]
하이드리히에 대해서는 엄청난 야망가이자 권력욕의 덩어리였으며, 보르만과 친한 척하면서 히믈러와 보르만 사이를 오가며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13] 하이드리히 암살에 히믈러가 관여했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히믈러에게는 경사였다고 말했다.[14]
4. 평가
2001년,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버린 지 56년 만에 오스트리아 슈티리아의 알프스 호수에서 개인 나치 보안 봉인이 발견되었다. 휴가 중이던 네덜란드 시민이 이 봉인을 발견했다. 봉인에는 "Chef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치안경찰 및 SD 국장)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봉인을 조사하여 1945년 5월 유럽 전쟁의 마지막 날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
참조
[1]
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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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e: Ernst Kaltenbrunner, 1903-1946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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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破戦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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